덜커덩
뒤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기에 뒤돌아보니 그동안 나의 이삿짐을 날라주었던 여행용 가방의 바퀴 하나가 빠져서 저 멀리 뒤쪽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걸 산 게 관리국 입국하기도 전이구나. 여태까지 버틴 게 더 용하다.
결국 여행가방을 들고 - 어깨 빠지는 줄 알았다 - 사무실에 가서 재배치 관련해서 서류처리를 했다. 물론 모든 자료는 전산으로 이관되지만 최종적으로 본인이 도착했다는 걸 확인받으려면 면대면을 해야 하니까.
“본격적인 업무는 내일부터 시작하는 걸로 하고, 일단 짐부터 푸세요. 숙소는 3구역 A4 실입니다. 기본적인 것들은 가져다 놨을 텐데, 혹시 없으면 연락 주시고요.”
담당자 분이 내가 길치 끼가 있다는 걸을 어떻게 아셨는지 친절하게 기지 단면도를 개인 단말기에 복사해 주어서 첫 날부터 미로찾기를 하는 봉변은 피할 수 있었다. 방은 내 예상대로 1인실이었다. 이곳과 같이 기지 내 정기 상주자가 적은 곳에서는 숙소가 남기 때문에 - 보통 남는 숙소는 창고로 쓴다 - 1인실을 주는 경우가 많더라는, 경험에서 나온 추측이랄까.
방에 들어가자 마자 짐에서 당장 필요한 옷가지와 세면도구만 꺼내서 샤워를 했다. 차원항행선에서도 샤워실은 사용할 수 있지만, 왠지 항행선의 샤워실은 묘하게 ‘닭장’ 느낌을 풍겨서 개인적으로는 승무원으로 탈 때가 아니면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가방의 지퍼를 닫아 방 구석에 세워두었다. 처음에는 매번 짐을 다 꺼내놓았지만, 다음 발령지로 이동할 때 그걸 포장하는 데만 하루씩 드는 진상짓을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 이번 발령부터는 그냥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꺼내기로 방침을 바꿨다. 이건 좀 먹혀야 할텐데. 아니, 그 전에 가방이 아작나 버렸으니 어차피 다 꺼내야 하려나.
어찌 되었든 내일 하지 뭐, 라는 팔자 좋은 생각을 하며 잘 정리된 침대 위에 누웠다.
사실 이번 파견지는, 그 동안 돌아다녔던 곳에 비해서는 나름 괜찮은 편이다. 특별히 분쟁지역도 아니고, 현지민들과의 마찰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용도가 불분명해져서 상주 국원이 적은 것뿐이다. 오면서 이곳에 대한 관리국 보고서를 읽어본 결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기지 크기에 걸맞은 인원이 상주했던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차원항행선의 중간 보급지로 주로 사용된 데다, 관리국에서 필요한 몇 가지 필수자원들을 대량으로 채취해 내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년 8개월 전 몇 가지 이유로 함선 운행경로가 바뀌고, 때맞춰 자원도 점차 고갈되어 수지타산이 맞지 않게 되어 이곳의 중요도가 급격하게 하락했다. 현재 상주인원이 2년 전에 비해 1/2 수준으로 떨어져 있는 상태라고 하는데, 현재 인원으로는 이곳을 유지/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빡빡한 실정이다. 최근 정례보고서를 읽어보니 관리국에서는 이 포스트의 원활한 유지관리를 위해 6개월 이내에 일부 미사용 구획을 완전 폐쇄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는 성 싶다.
인수인계 받을 때 받은 서류를 읽어보니, 유지보수 쪽으로 분류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조달청에 2년 정도 있던 전력 때문인지, 어느 포스트를 가도 내게 꼭 그 자리를 준다. 아니, 애초에 내가 배정받는 이유가 그 자리에 때워 넣을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거니까 선후가 바뀐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만. 밑에 몇 명이나 있는지 궁금해서 계층도를 열어보려 했으나 아직 ID 권한 조정이 덜 되었는지 접속 권한이 없다고 떴다. 내일까지는 처리해놓겠지?
사실, 그걸 불러봐야 내일부터 충분히 겪어야 할 두통을 먼저 겪는 효과 외에는 별다은 효과가 없다. 이 정도로 인원부족인 포스트라면, 어차피 밑에 쓸 수 있는 사람도 몇 없을 거다. 있다고 해도 말 그대로 빈칸 메우기 식의 배정이라 일도 처음부터 새로 가르쳐야 할 게 뻔하니, 없느니만 못하다고 해야 되나.
침대에 누워 있으니 잠이 온다. 불이라도 끄고 자야겠지만, 일어나기 귀찮아서 그냥 밑에 깔려있던 이불을 머리 위까지 끌어올렸다.
춥다. 무의식중에 이불을 끌어올렸지만, 이미 이불 속으로 한기가 파고든 탓인지 몸이 영 덥혀지지 않는다. 몇 번 뒤척거리다가 결국 눈을 떴다.
“하으으으.”
눈앞으로 입김이 스쳐 지나간다. 새벽 시간에는 연료절약의 일환으로 보일러가 최소한으로 돌아가게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춥게는 하지 않을텐데. 일단 무슨 일인가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이불 밖으로 몸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입고 있는 것은 정말 잘 때 입는 긴 면 티와 추리닝 비스무레한 바지뿐이다. 난방이 제대로 안 되고 있는 곳에서 입을만한 옷은 절대 아니다. 이불을 몸에 둘둘 만 채로 일어나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서려는데,
“아오, 아오, 아오!”
그래도 조금 남아있던 잠기운이 확 달아났다. 몇 년 전에 빙판 위를 맨발로 걸었을 때가 아련하게 떠오른다. 하필 신발은 입구에 벗어놨기 때문에 이불을 밟고 질질 끌면서 이동해야 했다. 신발도 찬 데 나뒀으니 서늘한 것이야 똑같지만, 최소한 발바닥이 얼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조금 추운 느낌이 덜 들어서 - 움직여서 열이 난 것인지 몸이 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간신히 이불에서 나와 점퍼와 등산용 바지를 하나 꺼내 입었다. 일단 동사의 위기를 넘긴 것까진 좋았으나, 그 다음엔 뭘 해야 할 지 모르겠다. 무작정 복도로 나간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여기보다 상황이 더 좋다는 보장도 없으니까. 일단 혹시나 해서 단말기를 가동해 보니, 다행히도 작동은 했다. 디스플레이는 추위 탓인지 갱신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지긴 했지만, 본체 자체가 작동이 안 될 정도는 아닌 모양이다.
이 순간, 이전에 조달청에서 일하면서 관리국의 깐깐한 검수규칙에 진절머리를 쳤던 내 자신을 반성했다. 역시 모든 규칙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다행히도 그새 권한 변경은 되었는지 메인프레임에 로그인할 수 있었다. 입김을 호호 내뱉으며 시스템을 들쑤시고 다니니, 역시 중앙보일러가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메인프레임에 ‘인식’ 되지 않는다고 해야겠다. 관리국은 건물을 신축할 때 9할 이상의 장비를 중앙 전산에서 조작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데, 보일러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아예 중앙 시스템 상에서 인식이 안 되는 경우라면, 물리적 사보타주까지도 고려해 볼 수 있겠다. 온도측정기를 본 결과 내가 있는 구역의 온도는 약 11.2도. 현재도 꾸준히 내려가고 있는 중이니 몇 시간 내로 0도 가까이 내려갈 것으로 보인다. 실외온도가 약 영하 5도에서 7도 정도 되고 있으니, 그 이상 떨어지지는 않을 성 싶다. 열 감지 센서로 보면 지휘실 쪽에서 뭉친 열 반응이 보이는 곳으로 보아 이미 그쪽에서 대책회의라도 여는 모양이다.
아니, 다 좋은데 나는 왜 안 부른 거야? 1시간만 더 방치해놨어도 저 얇은 이불 아래에 있었다간 저체온증 걸려서 ‘싸늘한’ 시체가 될 뻔 했다고. 갑자기 발끈 끓어올랐지만, 밖의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곧 가라앉았다. 밖인지 안인지 구별이 안 되는 복도를 걸어가면서 잠시 내 자신에 대해 고민해보는 시간도 가졌다. 전자는 심리적인 끓어오름이고, 후자는 육체적인 차가움인데 어째서 서로 영향을 미치는 걸까.
딴 생각을 한 탓에 살짝 우회했지만, 그래도 처음 온 것 치고는 크게 떠돌지 않고 지휘실 문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자동으로 열려야 할 문이 열리질 않는 것이다. 영상이라면 아직 문이 얼 정도는 아닐 텐데. 인식장치 고장인가 싶어 옆쪽에 달려있는 ID카드 인식기에 카드를 가져다대 보니 아예 인식기의 전원이 꺼져 있었다. 나참.
퉁퉁퉁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차임벨이 없으면 주먹으로. 어쨌든 안에 사람은 있을 테니, 나를 불쌍히 여긴다면 누군가 문을 열어주겠지.3분여 정도 손이 으깨져라 문을 두드린 끝에 드디어 오른쪽 인식기에 전원이 들어왔고, 곧 문이 열렸다. 안에서 흘러나오는 온기에 반사적으로 오른쪽 발을 들었지만, 그 발을 내려놓기도 전에 나를 겨누고 있는 너덧개의 관리국 지급형 디바이스의 끝자락이 보였다.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무릎을 꿇는다.”
저기, 이 차디찬 얼음바닥에 무릎을 꿇으라굽쇼? 디바이스와 바닥 중 어느 쪽이 더 위험할지 머릿속으로 바쁘게 생각하며 일단 들었던 발만 원래 위치에 내려놓은 채 머뭇거리고 있으니 오른쪽에 서 있던 무장국원 하나가 디바이스를 위협적으로 들이대며 다시 외쳤다.
“말 안 들리나! 무릎 꿇고, 손 머리 뒤로!”
“에, 옙!”
한 번만 더 말 안 들었다가는 몸에 통풍구 하나를 신설할 좋은 구실을 만들어 줄 것 같아 이번에는 바로 무릎을 꿇고 머리 뒤로 손을 올렸다.
아으, 무릎 아파. 그리고 다리도 시리다.
“신분을 밝혀라!”
“어제부로 제 70 관리지정세계 제 1포스트에 배정된 채 병진 상병입니다.”
오른쪽에 서 있던 사람이 아무래도 계급이 제일 높은 모양인지 옆에 서 있던 사람에게 뭐라 명령을 내렸고, 명령을 들은 쪽은 주머니에서 개인 디바이스를 꺼내는 것을 보니 신원조회를 하는 모양이었다.
“사실입니다. 어제 도착했던 함선 탑승자 목록에도 있고, 인사자료도 어제 부로 이쪽으로 이관되어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도 대장이 명령을 내린 뒤에야 내게 겨눠진 디바이스를 내려놓는 철저한 직업정신에 감탄하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10여명의 관리국 동복을 입은 사람들이 동그랗게 캠프파이어라도 하듯 뭉쳐 있었다. 중심에 있어야 할 불꽃이 없다는 게 흠이지만. 그 중에는 어제 내 인수인계를 도와준 분도 있었다.
“밖에서 문 두드리시던 분이..?”
“예.”
“감시카메라를 돌려보고 있는데 이 사무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있어서 일단 혹시나 싶어 무장국원들이 나가본 건데 말이죠.”
그러고 보니, 애초에 관리국 시설에서 사용하는 자동문은 대 마력처리에 물리적 두께도 최소 5cm 정도는 되니까 내가 두드린다고 안에서 들릴 상황도 아니구나. 손 부러지기 전에 누가 봐서 그나마 다행이네.
“어쨌든 결과가 좋으면 된 거죠. 어떻게 된 겁니까?”
“45분 전에 시설 전체의 난방을 주관하는 중앙 보일러가 가동을 완전 정지했어요. 방금 전에 밑에 내려간 팀에서 연락이 왔는데 주요회로 몇 군데가 완전히 타 버려서 이곳에서는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라네요.”
기본적으로 이곳의 보일러라고 별 것 없다. 물을 덥혀서 난방도 하고 온수도 나오게 하는 평범한 보일러인데, 다만 지구와는 달리 마력로에서 마력을 뽑아내 물을 덥히는 열에너지를 얻어낸다. 본국이나 최근에 설립한 포스트 등에서는 아예 발전기와 보일러를 합친 - 굳이 말하면 하이브리드 식 - 물건도 있지만, 이 건물에 달려 있는 건 분리형인 모양이다. 그러나저러나 보일러가 나가는 건, 이런저런 곳을 떠돌아다니는 유목민 인생인 나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다. 때맞춰 날이 말 그대로 ‘얼어 죽도록’ 추운 이 시점에서 첫 경험을 한다는 게 정말 슬프다.
눈을 돌려 앞에 띄워진 대형 패널 중 하나를 보니 바깥의 날씨가 상당히 살벌한 모양이다. 10분 전부터 눈발도 흩날리기 시작한데다 바람도 꽤 센 상황. 밖을 나가려면 본격 제설장비라도 준비해야 할 정도이다.
“그래서, 본국에서 지원은 언제 온답니까?”
“위성연결은 이 날씨에선 절대 무리고, 아공간으로 연결된 본국 핫라인으로 연락할 겁니다. 한 5분 전에 갔으니 슬슬 연락이 올 텐데요.”
때맞춰서 메인 패널에 통신 창 하나가 올라왔다.
「핫라인도 불통입니다. 근처 항성의 흑점활동으로 시공연속체가 통신을 할만큼 부드러운 상태가 아닙니다.」
(총 5,540자)
이번 연작의 목표 : 한 편에 5천자 이상은 쓰자.이글루스 가든 - 이글루스 리리컬 동맹단 가든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