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협조

“서류는?”

그는 자신의 키도 넘는 서류를 실어놓은 짐 운반용 카트를 털썩 내려놓았다. 그 때 아슬아슬하게 위에 얹어져 있던 박스 하나가 흔들거리다 바닥으로 낙하했다. 그는 몸을 날려 - 말 그대로 - 상자를 받아내긴 했지만, 결국 안에 있는 내용물이 쏟아졌기 때문에 그의 노력이 딱히 역할을 했다고는 보기 힘들었다.

“그것들이 왠 일이고?”
“읏샤. 일단 보시고 이야기하세요.”

그는 바닥에 떨어진 서류철들을 대충 주워서 상자 위에 올려선, 책상 위에다가 털썩 올려두었다. 그의 맨송맨송한 반응의 이유를 궁금해 하며 그녀는 위에 얹어져 있던 서류철을 펼쳐서 내용물을 훑어보았다. 서류를 훌훌 넘겨보던 그녀는, 대충 서류철을 덮어서는 책상 위에 놓고 다른 서류철을 펼쳐보았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다른 상자에 있는 서류도 다 저 꼬라집니다.”

자신이 끌고 온 박스를 부대장실 구석에 쟁여두는 동안, 그녀는 결국 그 박스 안에 들어있던 서류를 다 꺼내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분류번호를 보면 분명히 자신들이 요청한 서류는 맞다. 하지만 대부분의 내용이 먹칠되어 있는 상태였다. 사실상 연결사와 접미사 빼고는 대부분의 내용이 삭제된 상태였다. 그녀는 뭐라 더 대꾸할 말도 생각나지 않아서 자신의 자리에 힘없이 앉았다.

“뭐라더라? 특례규정 5장 7항에 의거해서 지상본부 내부회의에 의해 ‘기밀사항’ 으로 분류된 것은 반드시 자료를 제공할 의무가 없답니다.”

애초에 지상본부에서 6과의 수사에 전면적인 협조를 하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사람을 귀찮게 할 줄은 미처 몰랐다, 고 그녀는 생각했다. JS 사건 이후의 이런저런 사후조사를 하는 데 있어서 스칼리에티와 내통을 한 고(故) 레지어스 게이즈 준장, 더 넓게는 지상본부 시스템 자체에 대한 자료는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항상 대립각을 세워온 본부와 지상본부다. 수장인 레지어스가 불미스럽게 살해당하고, 게다가 그가 관리국 공공의 적이라 할 수 있는 1급 차원범죄자인 스칼리에티와 내통하고 있었다는 것은 지상본부에 있어 단순한 수치를 넘어서 치욕의 수준이었다. 그런 범죄를 본국의 영향력이 닿아 있는 6과에서 조사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 것이었다.

레지어스 관련 자료 제공을 요청하는 6과에 대해 지상본부는 내규를 내세우며 전자자료 형태로는 보낼 수 없다는 것을 몇 번의 설득과 회유를 통해서 ‘문서 형태로 보내주겠다’ 는 약속을 받아냈건만, 고작 받은 것들은 이면지로나 쓸모가 있을 이런 것들뿐이었다는 것이 그녀의 마음을 답답하게 했다.

“이건 왜 들고 왔노? 염장 지를라고?”
“그런 건 아니고요. 사무실 재활용함이 꽉 차서요. 나중에 분리수거일 때 가지러 오겠습니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온갖 감정이 뒤섞여 차마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입도 열지 못할 정도였는데, 그의 말 한 마디에 갑자기 웃음이 올라왔다. 그렇다고 갑자기 웃는 것도 이상해 보일 것이라는 것을 간신히 눈치 챈 그녀는, 손짓으로 그에게 나가라는 표시를 했다. 그는 경례를 붙이고는 부대장실을 나섰다. 그가 나간 뒤에도 얼마동안 숨죽인 채로 끅끅거리던 그녀는, 겨우 속을 가라앉히고 패널을 조작해 개인회선 하나를 열었다.

“무한서고 사서장 유노 스크라이업니다.”
“요새 콜센터 하나? 얼굴 다 뷔는데 뭐 그렇게 통성명까지 하노.”
“아, 하야테야?”

언뜻 봐도 나는 고문서요, 라고 주장하는 두루마리를 들여다보고 있던 유노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패널을 들여다보았다.

“밥은 묵고 댕기나?”
“그러고 보니, 오늘 점심을 먹었던가.. 응, 일단은 챙겨먹고 있어.”

직접 만났다면 늘 들고 다니는 태클용 부채로 등짝을 후려 줬을 테지만, 아직 관리국의 기술이 그 정도까지 발전하지는 않았기에 하야테는 그저 혼자 삭히고 말았다.

“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 부탁한 그것 때문에 연락한 모양이네.”
“어.”

패널의 유노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는데 어제 이쪽으로 고문서 한 두루마리를 넘겨줘서. 지금 분류작업 때문에 무한서고 전원이 동원되고 있어서 말야. 개인적으로도 이 쪽 유물엔 관심이 있어서...”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해 주듯 유노의 앞쪽으로 언뜻 보이는 책상에는 책자, 아티팩트 등이 너저분하게 쌓여 있었다.

“미안, 내 일 넋두리를 할 때가 아니구나. 어쨌든, 지상본부 쪽의 자료보안은 철통같아. JS 사건 때 메인프레임이 완전히 뚫린 이후로 완전히 시스템을 갈아엎었거든. 기술 방식도 정통 관리국 방식이 아닌 다른 차원의 기술도 일부 도입한 하이브리드 식이라고 해.”
“그 정도가?”
“기술부 쪽의 아는 사람과도 이야기를 좀 나눠봤는데, 현재 그 시스템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기술부 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래. 현재도 기술부 쪽에서 시스템 정비 및 관리를 위해 몇 명씩 장기파견 내려놓은 상태라고 하더라고.”

하야테는 의자에 몸을 내맡겼다. 의자가 무게를 받아 뒤로 확 젖혀졌다가 반동으로 다시 올라왔다. 이럴 때 지상본부 쪽에 본국의, 아니 자신의 명령을 받아 일할 수 있는 사람 하나가 참 절실했다. 그동안은 그런 ‘쥐새끼 잠입’ 식의 활동은 별로 내켜하지 않았지만 일이 이만큼 안 풀리니 어떤 수단에라도 기대고 싶어졌다.

“그래. 바쁜데 수고했데이.”
“아니, 뭐 하야테도 바쁘니까.”

남들이 보았다면, 제 3자가 보기엔 오십 보 백보인 두 워커홀릭이 그런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 참 재미있었을 테지만 그들 자신에게는 전혀 재밌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야테는 원래 친우와의 통화라도 용건 이외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편이지만 오늘은 달랐다. 왠지 그냥 끊어버리면 속에서 뭔가 올라올 것만 같았기 때문에, 시답잖은 이야기와 농담들을 꺼내면서 유노와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고 보니 요새 나노하랑 연락은 하나?”
“저번 주에 밥 약속했다가 펑크 난 이후로는, 둘 다 바쁘니까.”

하야테가 생각하기에, 이 두 사람은 본인들보다도 주변인들의 속을 새까맣게 태우는 재주를 갖고 있다. 그냥 평범한 친구라도 요즘같이 왕래가 뜸하면 소식이 궁금하거나 하는 게 정상이건만 주변에서 사실상 공인커플 소리를 듣는 상태임에도 두 사람이 연락하는 경우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가끔 만나는 것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만날 때가 거의 8할 이상이다. 하야테가 특별수사관을 하던 때는 그래서 부러 자신이 본국에 있을 때는 꼭 두 사람에게 연락을 해 같이 밥을 먹었다. 또 만나고 나면 그렇게 연락 안 했던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잘 놀기 때문이다.

“그럼 끊제이.”

패널이 닫히고, 다시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린포스는 현재 정비실에서 전체 점검을 받는 중이기 때문에 한 시간은 더 있어야 돌아올 것이다. 할 일이야 넘쳐흐른다. 말도 안 되는 서류를 보낸 지상본부에 항의서한도 보내야 하고, 밑에서 올라온 서류도 결재해야 하고 내일 있을 JS 사건 수사결과 1차 브리핑 준비도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그런 것은 잠시 미뤄도 좋은 일이 되었다. 한 시간만 자고 다시 하자, 라는 기분으로 그녀는 창문에 차폐막을 올리고 내부조명을 꺼 버렸다.

(총 3,431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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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군 | 2008/07/05 16:45 | 갈겨쓰기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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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무장괴한 at 2008/07/05 17:11
지상본부..! 역시 비협조적..! - 레녹
Commented by 무장괴한 at 2008/07/05 17:23
와와와~ - 무장괴한.
Commented by wizard at 2008/07/06 12:27
모땐놈들[응?]
Commented by 원삼장 at 2008/07/08 23:15
호오... 하지만 지상본부도 자신들의 구심점인 사람을 잃었으니 슬슬 내부 혼란 아니면 정리가 본국에서 직접 나서서 처리되겠군요... -원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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